시조는 조장(趙璋). 고려 중엽에 광록대부(光祿大夫) 검교대장군문하시랑(檢校大將軍門下侍郞)을 지냈다. 조장(趙璋)의 처음 이름은 준(俊) 혹은 준장(俊璋)이라 하였다. 순창(淳昌)에 세거하여 처음에는 본관을 순창(淳昌)으로 써오다 ‘신유보(辛酉譜)’(철종 1년) 수보(修譜) 때부터 순창(淳昌)의 옛이름인 옥천(玉川)으로 개칭하였는데 그 정확한 이유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순창군지(淳昌郡誌)’에 의하면, “고려중엽 조장(趙璋) 이음사관(以蔭仕官) 검교대장군(檢校大將軍)”이라 하여 득관(得貫)을 뒷받침하고 있다. 그리하여 조선 중기 이후까지 ‘방목(榜目)’등 문헌에는 순창(淳昌)으로 나타나 있음을 유의해야 하며 현재는 대부분 옥천(玉川)으로 칭관(稱貫)하나 극히 소수만이 그대로 순창(淳昌)을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
본관지 연혁
옥천(玉川)은 순창(淳昌)의 다른 이름이다.
순창(淳昌)은 본래 백제의 도실군(道實郡)인데 신라조에 순화군(淳化郡)으로, 고려조에는 순창현(淳昌縣)으로 고쳤다. 명종 5년 감무(監務)를 두었고 충숙왕 1년에는 승국통(僧國統) 정오(丁午)의 고향이라 하여 군(郡)으로 승격시켰으며 조선조에서도 그대로 따랐다.
시조 조장(趙璋)을 비롯하여 그의 아들 조홍규(趙洪珪), 손자 조전(趙佺) 등 3대는 순창(淳昌)에 세거하였다. 즉 순창군지(淳昌郡誌)에 “고려중엽 때 조장(趙璋)이 음사(蔭仕)로 검교대장군(檢校大將軍)이 되었다”는 기록과 함께 순창군(淳昌郡) 사마안(司馬案)에는 “조홍규(趙洪珪)는 진사(進士)이며 그의 아들 조전(趙佺)은 생원(生員)이다”라고 하였고, 옥천지(玉川誌)에도 같은 내용이 보인다. 그런데 4세인 조원길(趙元吉)이 중앙(中央)에 진출한 이래 일부가 개경(開京)으로 옮겨가 살았던 것 같다. 조원길(趙元吉)은 공양왕을 책립한 공으로 옥천부원군(玉川府院君)에 봉해졌으니 장차 고려가 망할 것을 알고 향리(鄕里)인 순창(淳昌)에 은거하고 그의 아들 조영(趙瑛), 조유(趙瑜) 등도 고려가 망한 뒤 퇴거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그후 조유(趙瑜)는 다시 순창(淳昌) 건곡(虔谷)에서 순천(順天)으로 이거(移居)하여 살았는데 이때부터 순천(順天) 주암(住岩)을 중심으로 전남 일대의 명족(名族)으로 자리를 굳히게 되었다. 지금은 관향(貫鄕)인 순창(淳昌)을 비롯하여 전남 승주(昇州), 순천(順天), 담양(潭陽), 구례(求禮), 여수(麗水), 보성(寶城), 광주(光州)직할시, 남원(南原), 곡성(谷城), 임실(任實), 전주(全州), 고창(高敞), 서울 등지에 흩어져 살고 있으며 특히 승주군(昇州郡) 주암면(住岩面) 일대에는 자손들이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씨족史
옥천조씨(玉川趙氏)는 고려조에 광록대부(光祿大夫) 검교대장군(檢校大將軍)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낸 조장(趙璋)을 시조로 하는 성씨다.
옥천조씨(玉川趙氏)의 가장 오래된 문헌으로 알려진 중종 때 사람 지제교(知製敎) 조침(趙琛)이 지은 직장공(直長公)의 묘갈(墓碣)에 의하면 조장(趙璋)을 시조로 하고 있다고 되어 있다.
옥천조씨(玉川趙氏)는 약 300년전 시보(始譜)부터 조장(趙璋)을 시조로 하고 있는데 처음에는 본관을 순창(淳昌)으로 써오다가 정확한 이유는 모르나 1861년 ‘신유보(辛酉譜)’부터 옥천(玉川)으로 개칭하여 왔다.
‘옥천조씨족보서문(玉川趙氏族譜序文)’에 옥천(玉川)은 순창(淳昌)의 별호(別號)라고 되어 있다. 순창(淳昌)에는 옥(玉)이 나왔다는 옥출산(玉出山)이 있고 순창읍(淳昌邑) 앞으로 흐르는 물이 옥천(玉川)이며 옥천동(玉川洞)이 있다. 충헌공(忠獻公) 조원길(趙元吉)의 옥천부원군(玉川府院君) 책봉도 이를 뒷받침하여 준다.
충청도 괴산(槐山)에 살고 있는 조자장(趙子長)을 시조로 하는 순창조씨(淳昌趙氏)와 동원(同源)이라는 설이 있어 두 문중에서 수십년 동안 고증을 찾고 있으나 확실한 고증이 없다.
옥천조씨(玉川趙氏)는 4세손 조원길(趙元吉)에 이르러서 가세(家勢)를 확장시키게 되었다. 그 분파(分派)는 3세손인 조전(趙佺), 조여(趙璵)에게서 시작된다.
조전(趙佺)의 아들 충헌공(忠獻公) 조원길(趙元吉)에게는 영(瑛), 유(瑜), 근(瑾), 염(琰), 숙(●)의 다섯 아들이 있다. 낙재공(樂齋公) 조영(趙瑛)에게는 두 손자가 있었는데, 큰 손자인 조사돈(趙士敦)의 후손이 정언공파(正言公派)로, 둘째 손자인 조사순(趙士淳)의 후손인 한림(翰林)공파ㆍ태인(泰仁)공파로 나누어진다.
충헌공(忠獻公)의 둘째 아들인 조유(趙瑜)의 후손은 부정공파(副正公派)인데 조사문(趙斯文)의 자손은 상호정파(相好亭派), 조숭문(趙崇文)의 자손은 절민공파(節愍公派)라 하며, 조근(趙瑾)의 후손은 광양공파(光陽公派)로, 조염(趙琰)의 후손은 절제공파(節制公派)로 나누어진다.
태사공(太師公) 조여(趙璵)의 후손은 손자대에서 두 파(派)로 나누어진다. 큰 손자인 조연(趙淵)의 후손이 판서공파(判書公派)로, 둘째 손자인 조완(趙浣)의 후손이 부사공파(府使公派)로 나누어진다.
후대로 내려가면서 족세(族勢)의 번창에 따라 분파(分派)는 모두 35개 파(派)로 세분된다.
옥천조씨(玉川趙氏)의 시조인 조장(趙璋)은 광록대부(光祿大夫) 검교대장군(檢校大將軍)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을 역임했다. 2세인 조홍규(趙洪珪)는 진사(進士)출신으로 충헌공묘갈명(忠獻公墓碣銘)에 의하면 밀직부사(密直副使)를 역임했고, 충헌공(忠獻公)의 공(功)에 의해 봉익대부(奉翊大夫) 판도판서(版圖判書)의 관직이 증직되었다. 3세 조전(趙佺)은 생원(生員)이었는데, 아들인 조원길(趙元吉)의 공으로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ㆍ삼중대광(三重大匡) 보국광록대부(輔國光祿大夫) 옥천부원군(玉川府院君)에 추봉되었다.
조여(趙璵)는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태사상주국(太師上柱國) 문하시중(門下侍中) 평장사(平章事)의 관직에 올랐다. 고려 충정왕 때에 집의(執義)로서 서연(書筵)에서 박충좌(朴忠佐), 이제현(李齊賢), 정천유(鄭天濡) 등과 시독(侍讀)했다.
고려말에 조씨(趙氏)를 현족(顯族)으로 자리잡게 한 인물은 농은(農隱) 조원길(趙元吉)에 의해서였다. 충목왕 1년(1345)에 등과하여 관직이 검교문하시중(檢校門下侍中)에 이르렀는데, 정몽주, 설장수(偰長壽)등과 이름을 견주었다. 1389년에 정몽주, 설장수(偰長壽), 성석린(成石璘) 등과 더불어 공양왕을 즉위시킨 공으로 1등훈에 책록되어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ㆍ추충구의익대필성극복공신(推忠舊義翼戴弼成克復功臣)ㆍ옥천부원군(玉川府院君)에 봉해졌다. 후에 순창(淳昌)에 퇴거했는데, 당시에 목은(牧隱)ㆍ포은(圃隱)ㆍ야은(冶隱)ㆍ도은(陶隱)과 더불어 5은(隱)이라고 칭했다 한다. 농은(農隱)이 순창(淳昌)에 퇴거했고, 그가 옥천부원군(玉川府院君)에 봉해졌으므로 후에 그의 후손들이 옥천조씨(玉川趙氏)라고 부르게 된 것이 아닌가 싶다.
충헌공(忠獻公)의 다섯 아들은 모두 관직에 나아갔다. 조영(趙瑛)은 자(字)가 영옥(英玉)이며 고려말에 서운관부정(書雲觀副正)을 지냈고, 조선조에 들어서 태종이 이조판서(吏曹判書)ㆍ세자사(世子師)에 봉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또한 날마다 산에 올라가 옛 임금을 그리워하였는데, 그때 지은 “저 횐구름 내마음 알거나, 청산만이 고인같네. 나라 잃은 슬픔 말하려니 구름낀 산이 찡그리네”라는 시가 있다. 그때 사람들은 그를 백이숙제(伯夷叔齊)에 비유하고, 그가 노닐던 산을 정금봉(停琴峰)이라 하였다 한다. 조유(趙瑜)는 고려조에 전농시부정(典農寺副正)을 지냈는데 고려가 망하자 불조현(不朝峴)에 들어가 절의(節義)를 지켰다. ‘불조현지록(不朝峴誌錄)’에 “수양산 달이 내 마음을 비춘다”(수양산월(首陽山月) 조아심간(照我心肝))이라 하였으며 두문동(杜門洞) 72현(賢)의 한 사람이다. 태종이 검교한성윤(檢校漢城尹)을 제수하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효양에 뛰어나서 부모(父母)의 상(喪)에 각각 3년을 시묘(侍墓)하였으며, ‘신증동국여지승람’ 순창군조에 효자(孝子)로 실렸다. 세종 10년에 죽으니, 세종께서 1품례(品禮)로 장사지낼 것을 명하고 정려(旌閭)를 내렸으며, 어제시(御製詩)로 그의 충(忠)과 효(孝)를 기렸다. 조근(趙瑾)은 그의 형인 조영(趙瑛)ㆍ조유(趙瑜)와는 달리 고려조에서는 벼슬을 하지 않고, 태종조에 무과(武科)를 거쳐 광양현감(光陽縣監)을 지냈다.
조염(趙琰)은 무과(武科)를 거쳐 보공장군(保功將軍)ㆍ절제도위(節制都尉)에 이르렀다. 조여(趙璵)의 손자인 조연(趙淵)은 문학으로 이름이 있었고, 태종조에 문과(文科)를 통해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이르렀다.
조숭문(趙崇文)은 세종 때에 무과(武科)에 급제하고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의 관직에 이르렀다. 세조 2년에 사육신(死六臣)의 단종복위운동에 관련되어 사형되었다. 후에 절민(節愍)이라는 시호(諡號)를 받았으며, 단종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 그의 아들인 조철산(趙哲山)도 단종복위를 꾀하다가 사형되었으며, 단종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
조사돈(趙士敦)과 동생인 조사순(趙士淳)은 정언(正言) 벼슬을 지냈으며, 조사순(趙士淳)의 손자인 한림공파(翰林公派) 조구령(趙九齡)은 중종 때 문과(文科)에 급제, 춘추관(春秋館) 한림(翰林)을 역임했다.
상호정파(相好亭派)의 조침(趙琛)은 중종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경주부윤(慶州府尹)을 지냈으며, 조이중(趙爾重)은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용호대장(龍虎大將)ㆍ삼도수군통제사겸춘천방어사(三道水軍統制使兼春川防禦使)에 이르렀는데 숙종 때 보사공신(保社功臣)에 책록되었다.
임진왜란 당시 김해부사를 지낸 덕계(德溪) 조정(趙挺)은 의사(義士) 70여명을 규합하여 금산(錦山)에서 왜적과 싸우던 중 순절했다. 조식(趙軾)ㆍ조여충(趙汝忠)은 임진왜란 당시 금산(錦山)의 조헌(趙憲)막하에서 왜적과 싸우다 순절하여 선무원종훈(宣武原從勳)에 책록되었다.
조언신(趙彦臣)은 문과(文科)에 급제, 호조참판(戶曹參判)을 역임하였고, 조명신(趙命臣)은 대사간(大司諫)을 지냈다.